세상을 혁신하는 건강한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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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9
약이 없어 고통받는 환자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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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약과 원조의약품 시대
우리나라 제약업의 역사는 구한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97년 대한제국의 선전관 민병호가 동화약품을 설립해 활명수를 판매한 것이 효시이며 1913년에는 조선매약주식회사가 최초의 법인으로 출범했다. 하지만 당시 유통되던 약은 모두 매약이었다. 매약은 기존의 한약재에 약간의 수입약재를 섞은 의약품이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관심은 ‘금광’과 ‘매약’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매약의 인기는 높았다. 가내수공업 형태로 만들어지던 매약은 신문 선전의 힘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지만 한국 제약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대원제약의 창업주 백부현 사장은 해방 후 매약 공급의 중심이었던 천일제약 부산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제약업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6.25 동란으로 고통받는 국민을 지키겠다는 제약보국의 신념으로 1958년 대원제약사를 설립하게 된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태동한 제약산업
01
해방 후 매약 유통으로 유지되던 제약산업은 한국전쟁 발발로 최소한의 기반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전쟁으로 기아와 질병이 만연했지만 제약시설이 파괴되면서 일부 치료약 생산마저 중단되고 말았다.
전쟁 기간 대한민국은 페니실린, 다이아진 같은 미군의 군수의약품과 가오루, 인단 등 일본에서 건너온 밀수 의약품에 의존해야 했다.

한편 임시수도였던 부산의 국제시장은 의약품 유통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모여든 제약업자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 약품상을 열었다.
일부는 창고를 빌려 소규모 시설을 갖춘 뒤 약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또한, 부상병 치료를 위해 의약품 군납에 참여하는 민간 기업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난민의 아픔을 보다
02
휴전이 선언되면서 부산에 모여 있던 제약업자들이 서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백부현 회장은 천일제약 부산지점장직을 사직하고 제약회사를 설립, 직접 치료제를 생산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 같은 창업주의 뜻에 지인 2명이 동참하였다.
백부현 사장은 3년여의 준비 끝에 1956년 부산시 동대신동에 태극약품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치료제를 전문으로 생산하려는 창업주의 의지는 실현되지 못했다. 동업자들이 수익성이 적고 생산이 까다로운 치료제 개발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보건제나 영양제로 불리던 매약 형태의 일반의약품 생산이 훨씬 쉬운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부현 사장은 치료제 중심의 철학을 굽히지 않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주사제 설비 구축
03
백부현 사장의 치료제 생산 과정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기술과 경험이 없었던 탓에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개발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백부현 사장은 가장 먼저 주사제 생산을 위한 설비 구축 작업에 착수했다. 대한약전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발행한 각종 기술 지침서를 독파하며 주사제 제작을 위한 주요 공정을 만들어 나갔다.

주사제는 다른 제형의 의약품보다 제조공정이 복잡하다. 조제→충전→멸균→검사 등 4단계의 공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자본과 인력, 기술적 어려움을 모두 극복해야 하는 미지의 영역이기도 했다
대원제약 주식회사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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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출범과 치료제 공급처 확장으로 성장하던 대원제약은
1964년 5월 27일 ‘대원제약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변경하고 서울영업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965년 6월, 본사를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1가 171-6번지로 이전, 대원제약 서울시대를 열었다. 2년 후인 1967년 대원제약은 서울을 비롯한 대구, 광주, 원주 등 전국 4개 권역에 영업출장소를 설치함으로써 전국적인 제약기업으로 도약하였다.
전후 제약 유통의 중심지였던 부산에서 출범한 대원제약이 창업 10년 만에 전국의 병원과 도매상에 전문 치료제를 공급하는 제약회사로 우뚝 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