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1980
드링크의 시대, 전문의약품 생산에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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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와 드링크 전성시대, 대원제약
1970년대 우리나라는 정부 주도의 산업화와 경제개발로 고도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제약업계 역시 연평균 34.7% 이상 성장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원료의약품 생산이 늘어나면서 항생제를 비롯한 수입약품이 국산화되었고 대량 생산체제 확립으로 약국 중심의 일반의약품 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경제개발의 역군'들을 위한 자양강장제와 비타민제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다.
대원제약은 드링크로 상징되는 일반의약품 시장 확대와 외국 제약사들의 합작 진출 러시 속에서도 한결같이 전문 치료제 생산에 집중했다.
특히, 향정신성 의약품과 마약류 제제 등 전문의약품 분야 경쟁력을 확고히 구축하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전국 병의원에 제품을 공급해 나갔다.
제약업계 역시 연평균 34.7% 이상 성장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원료의약품 생산이 늘어나면서 항생제를 비롯한 수입약품이 국산화되었고 대량 생산체제 확립으로 약국 중심의 일반의약품 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경제개발의 역군'들을 위한 자양강장제와 비타민제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했다.
대원제약은 드링크로 상징되는 일반의약품 시장 확대와 외국 제약사들의 합작 진출 러시 속에서도 한결같이 전문 치료제 생산에 집중했다.
특히, 향정신성 의약품과 마약류 제제 등 전문의약품 분야 경쟁력을 확고히 구축하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전국 병의원에 제품을 공급해 나갔다.
일반의약품 시대, 흔들림 없는 대원제약
01
국제원조처(ICA)를 비롯한 외국 원조기관의 구호 자금은
대한민국의 전후 복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약업계 역시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연간 40만 달러 규모의 ICA 원조 자금을 통해 산업 기반을 구축하였다.
제약 원료 및 기계설비의 도입을 통해 대량 생산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기반이 갖추어지자 정부는 수입의약품의 국산화를 적극 유도했다.
그 결과 스트렙토마이신, 페니실린, 테라마이신 등 수입 항생제 제품이 전면 국산화되었다.
제약업계가 항생제 생산에 집중하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시장은 포화상태에 접어들었다.
제약업계 역시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연간 40만 달러 규모의 ICA 원조 자금을 통해 산업 기반을 구축하였다.
제약 원료 및 기계설비의 도입을 통해 대량 생산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기반이 갖추어지자 정부는 수입의약품의 국산화를 적극 유도했다.
그 결과 스트렙토마이신, 페니실린, 테라마이신 등 수입 항생제 제품이 전면 국산화되었다.
제약업계가 항생제 생산에 집중하면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시장은 포화상태에 접어들었다.



치료제 전문성 강화(향정신성 의약품·마약류 취급 허가)
02
향정신성의약품은 인간의 중추신경계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로
오용이나 남용 시 인체에 심각한 위해를 가할 수 있다.
따라서 제조를 위한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백부현 사장은 1970년 12월, 까다롭고 어려운 향정신성의약품 제제 허가를 획득하였다.
전문 치료제를 요구하는 병원들의 니즈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이후 기관지 천식치료제와 정신·신경계 약물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 약물들은 만성질환용 치료제로 속효성과 지속성이 중요하다.
대원제약은 대상약물로 아미노필린(Aminophyline)과 페노바르비탈(Phenobarbital)을 선정하였다.
따라서 제조를 위한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백부현 사장은 1970년 12월, 까다롭고 어려운 향정신성의약품 제제 허가를 획득하였다.
전문 치료제를 요구하는 병원들의 니즈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이후 기관지 천식치료제와 정신·신경계 약물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 약물들은 만성질환용 치료제로 속효성과 지속성이 중요하다.
대원제약은 대상약물로 아미노필린(Aminophyline)과 페노바르비탈(Phenobarbital)을 선정하였다.
종합병원 진출, 전국적인 제약기업으로
03
서울시대 개막과 전국 영업활동이 시작된 1970년대에는 전국 주요 도매상에서 치료제 공급요청이 쇄도하였다.
병원에서도 전문의약품을 직접 주문하기 시작했으며 치료제 생산도 의뢰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1년 발매된 ‘루미날’과 1974년 발매된 ‘페노바르비탈정’은 병원의 니즈(Needs)에 적극 부합하면서 대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현장에서 두 제품의 효능이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직원들은 당장의 이익보다 전문치료제 분야의 경쟁력을 위해 험난한 길을 걷는 창업주의 철학과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도 전문의약품을 직접 주문하기 시작했으며 치료제 생산도 의뢰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1년 발매된 ‘루미날’과 1974년 발매된 ‘페노바르비탈정’은 병원의 니즈(Needs)에 적극 부합하면서 대원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현장에서 두 제품의 효능이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직원들은 당장의 이익보다 전문치료제 분야의 경쟁력을 위해 험난한 길을 걷는 창업주의 철학과 성과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134개 전문의약품 포트폴리오 확립
04
종합병원을 비롯해 다양한 병의원의 치료제 공급 능력이 확대되면서
대원제약의 제품 포트폴리오도 급격히 증가했다.
1971년 32개였던 대원제약의 제품군은 1975년에는 62개, 1979년에는 134개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제품군은 해열진통제를 비롯해 호흡기, 소화기, 순환기, 정신신경계, 설파제, 호르몬제,
항알레르기계, 부교감신경계, 자궁수축제, 약물해독제, 진통진정제 등 거의 모든 치료제로 확대되었다
대원제약의 제품 포트폴리오도 급격히 증가했다.
1971년 32개였던 대원제약의 제품군은 1975년에는 62개, 1979년에는 134개까지 확대되었다.
당시 제품군은 해열진통제를 비롯해 호흡기, 소화기, 순환기, 정신신경계, 설파제, 호르몬제,
항알레르기계, 부교감신경계, 자궁수축제, 약물해독제, 진통진정제 등 거의 모든 치료제로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