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1994
제약 전문기업의 인프라를 구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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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시장 개방과 KGMP
1980년대, 국내 제약업계를 뒤흔든 가장 큰 파고는 시장 개방이었다.
20여 년간 수출로 국가 경제를 일으킨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의 시장개방 압력을 수용해야만 했다.
제약산업 역시 전면적인 개방 로드맵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1984년 시행된 KGMP 기준 적용과 1986년 허용된 물질특허제도는 국내 제약산업을 뿌리 채 흔들었다.
원조자금과 일반의약품 대량생산으로 쉽게 성장해왔던 제약업계는 규모와 품질, 마케팅 측면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선진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했다.
백부현 사장은 이 같은 혁신적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재영입을 시도했고 선진 경영시스템을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KGMP공장 및 연구소 건설 등 선진 제약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을 장기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20여 년간 수출로 국가 경제를 일으킨 우리나라는 선진국들의 시장개방 압력을 수용해야만 했다.
제약산업 역시 전면적인 개방 로드맵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1984년 시행된 KGMP 기준 적용과 1986년 허용된 물질특허제도는 국내 제약산업을 뿌리 채 흔들었다.
원조자금과 일반의약품 대량생산으로 쉽게 성장해왔던 제약업계는 규모와 품질, 마케팅 측면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선진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했다.
백부현 사장은 이 같은 혁신적인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재영입을 시도했고 선진 경영시스템을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KGMP공장 및 연구소 건설 등 선진 제약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을 장기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의약시장 개방의 파고
01
1980년대 국내 제약산업은 시장 개방과 선진시스템 구축 의무화 등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격랑에 휘말렸다.
의약시장 개방과 우수의약품관리제도(KGMP; Korea Good Manufacturing Practice) 도입은 규모의 생산 시대를 유도, 제약업계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특히, 1984년 정부가 도입한 KGMP 제도는 중소 제약사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선진 제조 시스템 구축을 위한 대규모 자본 투자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의약품은 원료에서부터 시험, 보관, 제조관리, 품질관리 및 출하 등 전 과정에 체계적인 관리가 필수적인 특수 제품이다. 미국은 이러한 의약품의 제조 및 품질 기준을 표준화하기 위해 '우수의약품관리제도(The Good Manufacturing Practice, GMP)'를 만들고 이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의약시장 개방과 우수의약품관리제도(KGMP; Korea Good Manufacturing Practice) 도입은 규모의 생산 시대를 유도, 제약업계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특히, 1984년 정부가 도입한 KGMP 제도는 중소 제약사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선진 제조 시스템 구축을 위한 대규모 자본 투자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의약품은 원료에서부터 시험, 보관, 제조관리, 품질관리 및 출하 등 전 과정에 체계적인 관리가 필수적인 특수 제품이다. 미국은 이러한 의약품의 제조 및 품질 기준을 표준화하기 위해 '우수의약품관리제도(The Good Manufacturing Practice, GMP)'를 만들고 이를 전 세계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거대 변화에 대응한 선제적 리더십
02
제약 시장의 개방은 고도의 품질과 마케팅 능력을 갖춘 다국적 제약사와의 경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특히 병의원 거래가 절대적이었던 대원제약의 타격은 더 클 것으로 전망되었다.
경영 전반의 혁신과 제품 포트폴리오 변화, 과감한 영업정책의 수립이 절실했다.
백부현 사장은 외국기업과의 경쟁을 위해 선진 제약사의 생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다국적 제약사에 근무했던 전문 경영인을 전격 영입했다.
이는 당시 국내 대형 제약사들도 시도하지 못했던 혁신적 선택으로 시장의 변화를 읽는 혜안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특히 병의원 거래가 절대적이었던 대원제약의 타격은 더 클 것으로 전망되었다.
경영 전반의 혁신과 제품 포트폴리오 변화, 과감한 영업정책의 수립이 절실했다.
백부현 사장은 외국기업과의 경쟁을 위해 선진 제약사의 생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다국적 제약사에 근무했던 전문 경영인을 전격 영입했다.
이는 당시 국내 대형 제약사들도 시도하지 못했던 혁신적 선택으로 시장의 변화를 읽는 혜안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공격적인 영업전략 수립과 마케팅 활동
03
영업전략 및 영업관리 면에서도 선진 기법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팔기 쉬운 약이 아니라 반드시 팔아야 하는 약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품목을 △집중품목 △유지품목 △정리품목으로 구분해 차별화된 목표를 부여했다.
영업사원별로 할당액을 부여하되 집중품목의 판매증진을 독려하고 팔기 쉬운 품목은 일정량만 공급함으로써 전략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었다.
영업관리도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진화했다.
모든 영업사원은 일일 방문 거래처를 20개로 선정하고 결과를 '1일 활동보고서'로 작성했다.
영업실적이 구체적으로 평가됨으로써 영업 부진요소가 파악되었다. 이러한 혁신적 영업관리 정책은 의약분업이 시행된 2000년대 이후에나 업계에 도입되었다.
팔기 쉬운 약이 아니라 반드시 팔아야 하는 약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해 모든 품목을 △집중품목 △유지품목 △정리품목으로 구분해 차별화된 목표를 부여했다.
영업사원별로 할당액을 부여하되 집중품목의 판매증진을 독려하고 팔기 쉬운 품목은 일정량만 공급함으로써 전략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이었다.
영업관리도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진화했다.
모든 영업사원은 일일 방문 거래처를 20개로 선정하고 결과를 '1일 활동보고서'로 작성했다.
영업실적이 구체적으로 평가됨으로써 영업 부진요소가 파악되었다. 이러한 혁신적 영업관리 정책은 의약분업이 시행된 2000년대 이후에나 업계에 도입되었다.


진입장벽 뚫고 '세파계' 항생제 개발 성공
04
백부현 회장은 1970년대 말부터 치료제 포트폴리오 강화를 위한 연구개발을 강조하였다.
이는 이미 50여 개를 돌파한 외국 제약사들과의 치료제 시장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연적 전략이었다.
특히, 항생제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60년대 중반, 정부는 제약업계를 적극 지원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항생제 제품군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항생제 시장은국내 제약업체들 간 치열한 경쟁으로 포화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신규 진입 업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국내에 도입된 적이 없거나 생산 이력이 없는 신항생제 개발만 허용했던 것이다.
백부현 회장은 항생제 개발 없이 회사의 미래가 없다는
신념으로 신항생제 개발을 적극 독려하였다.
이는 이미 50여 개를 돌파한 외국 제약사들과의 치료제 시장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한 필연적 전략이었다.
특히, 항생제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1960년대 중반, 정부는 제약업계를 적극 지원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항생제 제품군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항생제 시장은국내 제약업체들 간 치열한 경쟁으로 포화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신규 진입 업체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다.
국내에 도입된 적이 없거나 생산 이력이 없는 신항생제 개발만 허용했던 것이다.
백부현 회장은 항생제 개발 없이 회사의 미래가 없다는
신념으로 신항생제 개발을 적극 독려하였다.
다양한 치료제 출시
05
1980년대 대원제약이 신규 허가를 취득한 신제품은 총 23종에 이른다.
이 중 전문의약품이 17종으로 주종을 이루었고 일반의약품은 6종이었다.
약효분류별 분포를 보면, 해열진통제가 4품목으로 가장 많고 진해거담제와 비타민제제가 3품목, 항생제와 대사성의약품, 골격근이완제 등이 각각 2품목을 나타냈다.
이외에도 순환기용약, 자궁수축제, 항간질제, 호르몬제제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치료제 분야 포트폴리오를 대폭 확장했다.
이 중 전문의약품이 17종으로 주종을 이루었고 일반의약품은 6종이었다.
약효분류별 분포를 보면, 해열진통제가 4품목으로 가장 많고 진해거담제와 비타민제제가 3품목, 항생제와 대사성의약품, 골격근이완제 등이 각각 2품목을 나타냈다.
이외에도 순환기용약, 자궁수축제, 항간질제, 호르몬제제 등 다양한 제품을 개발해 치료제 분야 포트폴리오를 대폭 확장했다.
향남공장 준공 및 KGMP 인증 획득
06
1984년 순수의약품으로 시작된 정부의 KGMP 기준 적용 권고는 제약산업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대규모 시설투자를 통해 선진 제약 설비를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소 제약사의 경우 이 같은 변화가 존립에 영향을 줄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1980년대 초 이미 흐름을 예측했던 백부현 회장은 다양한 혁신활동을 통해 경쟁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KGMP 기준 충족을 위한 시스템 구축은 해법이 쉽지 않았다.
수차례의 증설을 이어온 부산공장을 신규 GMP공장으로 전환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부현 회장은 결국 신규 공장 건설로 결론을 내리고 부지 확보에 나섰다.
최초로 고려된 곳은 백부현 회장의 고향인 경기도 이천시 장호읍 일대 33,057.8㎡(1만 평)규모의 부지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학원 부지로 용도가 제한되어 공장 설립이 어려웠다.
장학사업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던 백부현 회장은 훗날 이곳에 장호공업고등학교(現 부원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대안을 찾던 백부현 회장은 정부와 대한약품공업협동조합이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향남제약공단 부지를 주목했다.
대원제약은 중소 제약사를 위한 최초의 제약전문공단이었던 향남제약공단에 입주신청서를 제출했다.
정부와 조합의 적격 심사가 진행되었고 대원제약은 최종적으로 16,528.9㎡(5,000평)의 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대규모 시설투자를 통해 선진 제약 설비를 구축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소 제약사의 경우 이 같은 변화가 존립에 영향을 줄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1980년대 초 이미 흐름을 예측했던 백부현 회장은 다양한 혁신활동을 통해 경쟁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KGMP 기준 충족을 위한 시스템 구축은 해법이 쉽지 않았다.
수차례의 증설을 이어온 부산공장을 신규 GMP공장으로 전환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부현 회장은 결국 신규 공장 건설로 결론을 내리고 부지 확보에 나섰다.
최초로 고려된 곳은 백부현 회장의 고향인 경기도 이천시 장호읍 일대 33,057.8㎡(1만 평)규모의 부지였다. 그러나 이 지역은 학원 부지로 용도가 제한되어 공장 설립이 어려웠다.
장학사업에 대한 의지가 남달랐던 백부현 회장은 훗날 이곳에 장호공업고등학교(現 부원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대안을 찾던 백부현 회장은 정부와 대한약품공업협동조합이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향남제약공단 부지를 주목했다.
대원제약은 중소 제약사를 위한 최초의 제약전문공단이었던 향남제약공단에 입주신청서를 제출했다.
정부와 조합의 적격 심사가 진행되었고 대원제약은 최종적으로 16,528.9㎡(5,000평)의 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제제 연구의 산실, 중앙연구소 탄생
07
백부현 회장은 향남공장 건설을 준비하면서 중앙연구소의 건립을 함께 구상했다.
물질특허등록 허용 등 선진 제약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제품개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선진 연구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김동춘 사장은 KGMP 공장 건설과 연구소 건립 준비를 병행해 나갔다.
향남공장 준공 1년만인 1989년 9월 중앙연구소가 1,719㎡(520평) 규모로 향남공장 내에 완공되었다.
중앙연구소는 기기분석실을 비롯해 미생물실, 일반화학실험실, 동물시험실, 드래프트(Draft)실 등 최신 시험실을 갖추었으며 비소시험장치, 속슬렛장치, 용출시험장치, 칼핏샤스분측정기, 가스 크로마토그라피, 적외선분광광도계, Antibiohzzone Reader 등 첨단 시험장비를 완비했다.
물질특허등록 허용 등 선진 제약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제품개발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선진 연구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김동춘 사장은 KGMP 공장 건설과 연구소 건립 준비를 병행해 나갔다.
향남공장 준공 1년만인 1989년 9월 중앙연구소가 1,719㎡(520평) 규모로 향남공장 내에 완공되었다.
중앙연구소는 기기분석실을 비롯해 미생물실, 일반화학실험실, 동물시험실, 드래프트(Draft)실 등 최신 시험실을 갖추었으며 비소시험장치, 속슬렛장치, 용출시험장치, 칼핏샤스분측정기, 가스 크로마토그라피, 적외선분광광도계, Antibiohzzone Reader 등 첨단 시험장비를 완비했다.

의료보험 시대 개막과 신약 개발
08
1977년 직장의료보험 제도 도입 이후 우리나라의 의료보험 적용 대상자는 꾸준히 확대되어 왔다.
1989년 1월, 도시 자영업자까지 의료보험이 적용되면서 실질적인 전 국민 의료보험시대가 시작되었다.
의료복지 실현과 의약품 수요 확대라는 측면에서 호재였다.
1977년 2,506억 원이었던 의약품 생산액은 의료보험이 확대된 1989년, 2조 7,866억 원을 기록해 무려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자 정부의 적극적 시장개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국민들의 병원 이용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정부는 보험재정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약가 인하 등 강력한 규제 정책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1월, 도시 자영업자까지 의료보험이 적용되면서 실질적인 전 국민 의료보험시대가 시작되었다.
의료복지 실현과 의약품 수요 확대라는 측면에서 호재였다.
1977년 2,506억 원이었던 의약품 생산액은 의료보험이 확대된 1989년, 2조 7,866억 원을 기록해 무려 10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자 정부의 적극적 시장개입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국민들의 병원 이용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정부는 보험재정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약가 인하 등 강력한 규제 정책을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베트남 시장 개척
09
1993년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무역거래금지를 해제하면서 베트남 시장이 전면 개방되었다.
1980년대 말부터 의약품 수출 준비를 추진하고 있던 대원제약은 발 빠르게 베트남 시장 조사에 들어갔다.
국내 딜러를 통해 조사한 결과 대원제약 항생제 샘플에 대한 현지만족도가 매우 높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1994년 4월 김동춘 사장과 백승호 전무가 직접 베트남을 방문, 주요 제약사 및 도매상들과의 비즈니스 미팅에 들어갔다.
당시 베트남은 유럽 제약회사들이 독식하고 있었고 국내 제약사 몇 개가 막 진입한 상황이었다.
한국 의약품 품질에 대한 신뢰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당시 베트남은 정부 기관이 의약 유통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어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백승호 전무는 베트남 행정기관을 상대로 대원제약의 제품 경쟁력과 한국 제약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1980년대 말부터 의약품 수출 준비를 추진하고 있던 대원제약은 발 빠르게 베트남 시장 조사에 들어갔다.
국내 딜러를 통해 조사한 결과 대원제약 항생제 샘플에 대한 현지만족도가 매우 높게 나타났다.
이에 따라 1994년 4월 김동춘 사장과 백승호 전무가 직접 베트남을 방문, 주요 제약사 및 도매상들과의 비즈니스 미팅에 들어갔다.
당시 베트남은 유럽 제약회사들이 독식하고 있었고 국내 제약사 몇 개가 막 진입한 상황이었다.
한국 의약품 품질에 대한 신뢰를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당시 베트남은 정부 기관이 의약 유통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어 정부를 설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백승호 전무는 베트남 행정기관을 상대로 대원제약의 제품 경쟁력과 한국 제약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