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2008
혁신 제약기업으로 도약을 준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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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 경영체제, 의약분업 시대를 이끌다
1996년 창업주 영면과 함께 대원제약의 2기 경영을 이끈 백승호·백승열 사장단은 21세기를 앞둔 대원제약의 기업체질을 진화시키기 위해
10년에 걸친 혁신 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창업주의 '제약보국' 신념을 21세기 대원제약에 접목해 '인류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동반자'로 진화시키기 위한 위대한 도전이었다.
2001년 대원제약은 제약 100년사에서 가장 큰 변화로 기록된 의약분업 시대에 영업, 마케팅, 제품개발 전 분야에서 창업 이후 가장 큰 투자와 혁신을 단행했다.
1998년 출시된 '트리겔'은 최초의 블록버스터(Blockbuster) 제품으로 제산제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으며,
2006년 출시된 '초산 메게스트롤 현탁액'은 항암제 분야 최초의 개량신약으로 새로운 명성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2007년 단독임상으로 개발한 '펠루비정'은 국산 신약 12호라는 영광을 만들었다.
10년에 걸친 혁신 운동을 강력히 추진해 나갔다.
창업주의 '제약보국' 신념을 21세기 대원제약에 접목해 '인류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는 동반자'로 진화시키기 위한 위대한 도전이었다.
2001년 대원제약은 제약 100년사에서 가장 큰 변화로 기록된 의약분업 시대에 영업, 마케팅, 제품개발 전 분야에서 창업 이후 가장 큰 투자와 혁신을 단행했다.
1998년 출시된 '트리겔'은 최초의 블록버스터(Blockbuster) 제품으로 제산제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으며,
2006년 출시된 '초산 메게스트롤 현탁액'은 항암제 분야 최초의 개량신약으로 새로운 명성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2007년 단독임상으로 개발한 '펠루비정'은 국산 신약 12호라는 영광을 만들었다.
창업주 백부현 회장 영면
01
1996년 10월 5일, 대원제약 임직원들에게 청천벽력의 비보가 전해졌다.
창업주 백부현 회장이 6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1년 전인 1995년 12월, 정기 건강검진에서 간의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지만 심각한 소견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6년 10월 종합병원에 입원하여 조직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출혈이 발생해 급서하고 만 것이었다.
약이 없어 고통 받는 국민을 치료하기 위해 대원제약사를 설립, 수많은 치료제 개발로 국민 건강에 기여했으며 대원제약을 굴지의 제약기업으로 일군 창업주가 영면한 것이다.
제약업계의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청담동 자택에 마련된 빈소에는 제약업계를 비롯한 각계의 조문이 이어졌다.
대원제약은 백부현 회장의 장례를 회사장으로 결정하고 영결식이 열린 10월 9일을 '애도일'로 선포하였다.
창업주 백부현 회장이 68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1년 전인 1995년 12월, 정기 건강검진에서 간의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지만 심각한 소견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96년 10월 종합병원에 입원하여 조직검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출혈이 발생해 급서하고 만 것이었다.
약이 없어 고통 받는 국민을 치료하기 위해 대원제약사를 설립, 수많은 치료제 개발로 국민 건강에 기여했으며 대원제약을 굴지의 제약기업으로 일군 창업주가 영면한 것이다.
제약업계의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청담동 자택에 마련된 빈소에는 제약업계를 비롯한 각계의 조문이 이어졌다.
대원제약은 백부현 회장의 장례를 회사장으로 결정하고 영결식이 열린 10월 9일을 '애도일'로 선포하였다.

외환위기를 이겨낸 선제적 혁신
02
1990년대는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와 의약시장의 완전개방이라는
화두가 제약업계를 지배하였다.
이런 가운데 굴지의 대기업들이 제약업에 진출, 시장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1992년 시행된 금융실명제와 각종 금융 개혁 정책은 중소 제약사들의 경영난을 더욱 가중시켰다.
국내 의약품 생산실적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견디지 못한 중소 제약사들의 부도가 이어졌다.
대원제약 역시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한 향남공장과 중앙연구소 설립, 공격적인 신제품 개발 등으로 자금압박에 직면했다.
1990년 90억 원을 넘어섰던 매출액 증가율도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저성장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이런 가운데 굴지의 대기업들이 제약업에 진출, 시장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1992년 시행된 금융실명제와 각종 금융 개혁 정책은 중소 제약사들의 경영난을 더욱 가중시켰다.
국내 의약품 생산실적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저성장 시대에 돌입했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견디지 못한 중소 제약사들의 부도가 이어졌다.
대원제약 역시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한 향남공장과 중앙연구소 설립, 공격적인 신제품 개발 등으로 자금압박에 직면했다.
1990년 90억 원을 넘어섰던 매출액 증가율도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저성장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

기업공개, 국민 제약기업으로
03
제도·의식과 함께 경영진이 추진했던 또 하나의 혁신은 대원제약을 주식시장에 상장해, 21세기 혁신형 제약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업구조로 전환, 국민 제약기업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상장회사의 경우 유상증자 또는 다양한 사채 발행을 통해 합법적이고 적절하게 시장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투명하고 건전한 재무구조를 확립해 윤리적 기업으로서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원제약은 1994년 10월 29일 장외시장인 코스닥(KOSDAQ)에 먼저 등록해 점진적이고 완벽한 상장을 준비해 나갔다.
이후 증권거래소 상장을 위한 신주 공모 등 주식상장을 위한 제반 절차를 밟아 나갔다.
장외시장 경험을 통해 상장을 위한 토대를 구축한 대원제약은 1999년 8월 31일 이사회를 열어 대원제약 주식의 증권거래소 상장을 최종 확정하였다.
상장회사의 경우 유상증자 또는 다양한 사채 발행을 통해 합법적이고 적절하게 시장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투명하고 건전한 재무구조를 확립해 윤리적 기업으로서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원제약은 1994년 10월 29일 장외시장인 코스닥(KOSDAQ)에 먼저 등록해 점진적이고 완벽한 상장을 준비해 나갔다.
이후 증권거래소 상장을 위한 신주 공모 등 주식상장을 위한 제반 절차를 밟아 나갔다.
장외시장 경험을 통해 상장을 위한 토대를 구축한 대원제약은 1999년 8월 31일 이사회를 열어 대원제약 주식의 증권거래소 상장을 최종 확정하였다.

의약분업 시대, 대원제약의 도전
04
1999년 12월 7일 의약분업 시행을 골자로 한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라는 말로 상징되는 의약분업은 2000년 7월 1일부터 전격 시작되었다.
전문의약품 시장의 확대가 가장 큰 변수였다.
시행 3년만인 2004년, 전문의약품 생산실적은 완제의약품 시장의 70%를 돌파하였다.
이밖에도 처방 패턴 변화에 따른 고가 약품 증가, 일반의약품 시장 정체, 의원급 병원의 수요 증가 등 제약업계의 판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의사가 의약품 수요 창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치료제 분야에서 오랜 노하우를 쌓아온 대원제약은 이 같은 전문의약품 시장 확대에 긴밀히 대응해 나갔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라는 말로 상징되는 의약분업은 2000년 7월 1일부터 전격 시작되었다.
전문의약품 시장의 확대가 가장 큰 변수였다.
시행 3년만인 2004년, 전문의약품 생산실적은 완제의약품 시장의 70%를 돌파하였다.
이밖에도 처방 패턴 변화에 따른 고가 약품 증가, 일반의약품 시장 정체, 의원급 병원의 수요 증가 등 제약업계의 판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의사가 의약품 수요 창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치료제 분야에서 오랜 노하우를 쌓아온 대원제약은 이 같은 전문의약품 시장 확대에 긴밀히 대응해 나갔다.

'트리겔'의 신화와 또 한번의 혁신
05
2002년 4월,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대원제약의 블록버스터(Blockbuster) 제품으로 시장을 주도하던 '트리겔 현탁액·정' 제품의 비보험급여 전환을 결정하였다.
이는 의약분업 이후 가중되던 보험 재정 안정화를 위해 내린 조치로, 모든 복합소화성궤양용제의 일괄 비급여 적용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원제약을 비롯한 7개사 9개 품목이 비보험급여 품목으로 전환되었다.
'트리겔'의 비보험급여 품목 결정은 대원제약에 매우 충격적인 결과로 다가왔다.
병원 처방전 시장에서 급격한 수요 감소로 제품의 퇴출의 위기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참담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대원제약은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이의신청을 제기해 2002년 7월 재심의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트리겔 현탁액·정'의 비급여제산제 잔류 결정을 통보받은 것이다.
이는 의약분업 이후 가중되던 보험 재정 안정화를 위해 내린 조치로, 모든 복합소화성궤양용제의 일괄 비급여 적용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원제약을 비롯한 7개사 9개 품목이 비보험급여 품목으로 전환되었다.
'트리겔'의 비보험급여 품목 결정은 대원제약에 매우 충격적인 결과로 다가왔다.
병원 처방전 시장에서 급격한 수요 감소로 제품의 퇴출의 위기까지도 감수해야 하는 참담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대원제약은 식품의약품안전청에 이의신청을 제기해 2002년 7월 재심의를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트리겔 현탁액·정'의 비급여제산제 잔류 결정을 통보받은 것이다.

항암제 진입 신호탄, '초산 메게스트롤 현탁액'
06
2006년 10월 17일 대원제약은 암환자를 위한 식욕부진 개선제 '초산메게스트롤 현탁액'을 출시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의 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제약업계의 보고서에 따르면 암 환자의 63%가 영양실조 증상을 보이며 위암과 췌장암 환자의 경우 83%가 영양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조사 결과가 담겨 있다.
심지어 영양부족이 암 환자 사망 원인의 20%를 차지한다는 분석도 있었다.
항암치료에 따른 식욕부진이 암 환자 생존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산메게스트롤 현탁액'은 암 환자의 사이토카인(Cytokine) 분비를 억제하고 강력한 식욕증진 작용을 갖는 NPY(Neuropeptide Y)를 증가시켜 악액질(惡液質,cachexia) 발생을 억제할 뿐 아니라 식욕부진을 개선해 환자의 체중을 늘리는 장점이 있었다.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의 치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 제약업계의 보고서에 따르면 암 환자의 63%가 영양실조 증상을 보이며 위암과 췌장암 환자의 경우 83%가 영양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조사 결과가 담겨 있다.
심지어 영양부족이 암 환자 사망 원인의 20%를 차지한다는 분석도 있었다.
항암치료에 따른 식욕부진이 암 환자 생존에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산메게스트롤 현탁액'은 암 환자의 사이토카인(Cytokine) 분비를 억제하고 강력한 식욕증진 작용을 갖는 NPY(Neuropeptide Y)를 증가시켜 악액질(惡液質,cachexia) 발생을 억제할 뿐 아니라 식욕부진을 개선해 환자의 체중을 늘리는 장점이 있었다.
신약의 꿈 실현시킨 '펠루비정'
07
2007년 4월, 대원제약은 2000년대 초부터 연구개발을 진행해온 골관절염 치료제 '펠루비정'에 대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신약 허가를 획득하였다.
대기업도 쉽지 않은 신약 개발의 성과를 중견기업인 대원제약이 국내 12번째로 이룩한 것이다.
신약을 개발해 출원할 경우 20년 간 시장독점권을 가지면서 연간 4천억 원에서 11조 원에 달하는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 1품목의 가치는 자동차 3백만 대의 수출효과에 비견된다.
그러나 신약을 개발해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허가 취득 과정에 10년에서 15년, 거기에다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에 달하는 개발비용을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중소 제약기업들은 제네릭 의약품 시장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신약개발은 대기업 계열의 제약사 등 대형 제약사들이 주도해왔다.
이런 가운데 대원제약이 국내 12번째 신약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대기업도 쉽지 않은 신약 개발의 성과를 중견기업인 대원제약이 국내 12번째로 이룩한 것이다.
신약을 개발해 출원할 경우 20년 간 시장독점권을 가지면서 연간 4천억 원에서 11조 원에 달하는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따라서 신약 1품목의 가치는 자동차 3백만 대의 수출효과에 비견된다.
그러나 신약을 개발해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허가 취득 과정에 10년에서 15년, 거기에다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에 달하는 개발비용을 감내해야 한다.
따라서 중소 제약기업들은 제네릭 의약품 시장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신약개발은 대기업 계열의 제약사 등 대형 제약사들이 주도해왔다.
이런 가운데 대원제약이 국내 12번째 신약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향남공장의 발전과 수탁사업 태동
08
1991년 12월 6일 주사제를 비롯해 내용고형제, 내용액제, 연고제 등 모든 제형의 생산시설에 대해 KGMP 적격업체로 인정받은 향남공장은 2000년대 이후 매출액 증가와 치료제 포트폴리오 확대에 따라 대형화와 자동화를 통한 생산량 증대에 나섰다.
향남공장은 2003년 5월 전면적인 증축공사를 통해 제 2 생산동을 완공하였다. 이에 따라 37,672.7㎡(1,396평)의 공간이 신규로 확보되었으며 캅셀 충전설비, 증류수 제조설비, 시럽제 및 액상 바이알 제조 설비, 포장설비 등이 신규로 도입되었다.
이로써 향남공장은 액상 앰풀제 2,500만 개, 분말 바이알 300만 개, 내용고형제 4억 8,000만 정, 파우치제 2,200만 포, 시럽제 93만 병 규모의 생산 규모를 확보하게 되었다.
향남공장은 2003년 5월 전면적인 증축공사를 통해 제 2 생산동을 완공하였다. 이에 따라 37,672.7㎡(1,396평)의 공간이 신규로 확보되었으며 캅셀 충전설비, 증류수 제조설비, 시럽제 및 액상 바이알 제조 설비, 포장설비 등이 신규로 도입되었다.
이로써 향남공장은 액상 앰풀제 2,500만 개, 분말 바이알 300만 개, 내용고형제 4억 8,000만 정, 파우치제 2,200만 포, 시럽제 93만 병 규모의 생산 규모를 확보하게 되었다.

수출 500만 달러 달성
09
1994년 소화제를 시작으로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을 개척했던 대원제약은 수출 지역의 다변화를 통해 글로벌 사업의 성과를 높여 나갔다.
1999년 수출 1백만 불 탑을 수상한 대원제약은 매년 2배 이상의 성장을 이어가며 수출탑의 넘버를 갱신해 나갔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0년 2월에는 한국 의약품 수출입협회로부터 수출유공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꾸준히 증가하던 수출 물량은 2007년 수출 5백만 불 탑을 수상이후 폭발적인 증가율을 이어갔다 수출 지역도 아시아와 중동을 넘어 아프리카와 중남미까지 확장되었다.
2000년에는 중동의 아프가니스탄과 남미 도미니카에 수출이 성사되었으며 2003년에는 러시아, 에콰도르, 페루 등으로 공급 지역을 확장했다.
2007년 기준 대원제약의 수출 지역은 총 23개로 아시아가 9개국, 중동이 5개국, 아프리카 2개국,
중남미 7개국을 기록하였다.
수출 규모는 2000년 208만 달러를 기록했지만 2007년에는 521만 달러까지 확대되었다.
1999년 수출 1백만 불 탑을 수상한 대원제약은 매년 2배 이상의 성장을 이어가며 수출탑의 넘버를 갱신해 나갔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2000년 2월에는 한국 의약품 수출입협회로부터 수출유공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꾸준히 증가하던 수출 물량은 2007년 수출 5백만 불 탑을 수상이후 폭발적인 증가율을 이어갔다 수출 지역도 아시아와 중동을 넘어 아프리카와 중남미까지 확장되었다.
2000년에는 중동의 아프가니스탄과 남미 도미니카에 수출이 성사되었으며 2003년에는 러시아, 에콰도르, 페루 등으로 공급 지역을 확장했다.
2007년 기준 대원제약의 수출 지역은 총 23개로 아시아가 9개국, 중동이 5개국, 아프리카 2개국,
중남미 7개국을 기록하였다.
수출 규모는 2000년 208만 달러를 기록했지만 2007년에는 521만 달러까지 확대되었다.
창업 50년, 혁신의 미래를 제시하다.
10
1) 혁신의 지도, 선포
이슈와 변화에 직면해 시도하는 혁신은 진정한 혁신이 아니다.
대원제약은 IMF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8년, 구조조정이 목표가 아닌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선제적 혁신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이 혁신 운동은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0년에 걸친 기업문화 혁신 운동으로 이어졌다.
2) 사회적 제약기업의 길을 걷다
2008년, 백승호 사장은 창업 50주년의 의미와 비전에 대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원제약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약이 없어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한 창업”의 뜻을 반세기 동안 꾸준히 실천해왔으며 건강한 기업시민의 역할을 위해 임직원들과 함께 나눔과 봉사를 기업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만들어왔다는 취지였다.
이슈와 변화에 직면해 시도하는 혁신은 진정한 혁신이 아니다.
대원제약은 IMF 외환위기가 시작된 1998년, 구조조정이 목표가 아닌 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선제적 혁신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이 혁신 운동은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10년에 걸친 기업문화 혁신 운동으로 이어졌다.
2) 사회적 제약기업의 길을 걷다
2008년, 백승호 사장은 창업 50주년의 의미와 비전에 대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원제약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약이 없어 고통받는 국민들을 위한 창업”의 뜻을 반세기 동안 꾸준히 실천해왔으며 건강한 기업시민의 역할을 위해 임직원들과 함께 나눔과 봉사를 기업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만들어왔다는 취지였다.
